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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왕조의 피에는 타이족,크메르족 그리고 중동페르시아 몬족의 피가 섞여있다.
크메르인은 캄보디아 앙코르왓 제국을 건설한 민족입니다. 크메르인(ខ្មែរ, /kʰmaːe/)은 캄보디아 1,480만 명의 국민 중 주요 민족 그룹입니다. 이들은 크메르어를 말하며, 이것은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발견할 수 있는 몽크메르 어군의 한 종류입니다. 대부분의 크메르인들은 크메르식 불교의 신봉자이며, 이것은 상좌부 불교와 힌두교, 애니미즘, 조상 숭배가 혼합된 종교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메르인중 다수가 북크메르 지역이었던, 태국에 인접한 지역과 베트남에 인접한 메콩 강 삼각주 지역에 거주를 합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크메르인들은 크메르 크롬이라고 합니다.
크메르인도 당시 선진국에 해당하는 인도의 무역과 학문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종교와 과학, 문화를 수용하고 그들의 언어를 빌어왔습니다. 앙코르왓 회랑,벽에서 보이는 힌두교신들을 보면 크메르제국은 인도 힌두교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크메르 제국의 영화를 잘 보여주는 앙코르왓(크메르: អង្គរវត្ត, 영어: Angkor Wat, Angkor Vat)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옛 크메르 제국의 도성으로서 창건되었습니다. 앙코르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축조된 이래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입니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인 것입니다.
크메르인에 세운 크메르제국은 앙코르 왕조 모두를 포함하며, 9세기 ~ 15세기까지 동남아시아에 존재한 왕국으로, 현재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나라입니다. 앙코르 왕조는 무리한 원정과 사원건설로 13세기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고 급기야 1431년에 태국에게 수도를 빼앗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현재의 태국왕가는 크메르 타이족(Khme-Thai Family)이라 불리웁니다. 크메르족이 12세기경 동남아 지역 전체를 지배할 때 태국은 크메르제국의 변방에 해당하는 자그마한 일개왕국에 불과했습니다. 13세기 중엽이전의 타이족 국가들(북쪽의 란나왕국,중부의 수완나품왕국,롭부리왕국,남쪽의 나컨시탐마랏왕국)은 크메르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자그마한 소왕국들이었습니다. 태국의 소왕국들은 크메르제국과 혼맥을 유지하면서 크메르의 보호아래 왕권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태국왕가의 피에는 크메르피가 흐릅니다.
-1880년 분낙가의 자제들과 라마4세의 딸들
태국 대표왕조인 라마왕조는 초기에 왕권이 매우 약해서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페르시아몬족(Persian-Mon)족인 분낙(Bunnag)가문과 혼맥을 유지하면서 간신히 왕권을 유지합니다. 분낙가문은 중동 페르시아 몬족 출신입니다. 분낙가문은 중동 이슬람족인 페르시안 족과 미얀마의 주요 종족중 하나인 몬족의 피가 흐릅니다. 분낙가문은 태국 라마왕조 초기(라마2세~라마5세)에 태국국정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일종의 섭정입니다. 왕위 쟁탈전이 치열했던 라마2세에서 라마4세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칼라홈과 프라클랑을 겸직하고 있던 딧 분낙(Dit Bunnag)이었습니다. 라마3세 왕이 사경을 헤매고 있고 언제 왕위 계승 분쟁이 내전으로 비화할지 모를 상황에서 그는 왕을 결정하는 회의를 위해 모인 왕자와 귀족들 앞에서 그 해 47세이던 몽꿋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누구든 몽꿋의 권리에 도전하려는 자가 있다면 프라클랑(딧 분낙)과 먼저 싸워야 했다"(Steinberg 1989 : 118).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분낙 가의 대표가 확실하게 지지를 선언했고, 분낙의 결정은 정당성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도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왕위 계승은 일단락을 짓게 됩니다. 분낙가의 확실한 지지로 인해 다른 경쟁자들의 도전이나 그들에 대한 견제 등으로 야기되는 권력 투쟁이 뒤따르지도 않았습니다, 몽꿋은 분낙 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왕으로서의 업무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라마왕조에는 분낙가문과 혼맥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분낙가문은 출라롱컨대왕까지 혼맥관계를 유지합니다.
1868년,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몽꿋이 그해에 있었던 일식을 관찰하고자 각국 인사들과 더불어 떠났던 여행에서 말라리아에 걸립니다. 이 병으로 몽꿋은 사망하고 왕자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왕결정권은 또 다시 분낙 가로 돌아갔습니다. 추앙 분낙은 쭐라롱껀 왕자가 후계자임을 천명했고,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이전 부왕의 장남인 위차이찬(Wichaichan)이 몽꿋의 뒤를 잇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다행히 출라롱컨 왕자는 회복되었고, 분낙은 몽꿋의 부탁대로 최선을 다해 섭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 일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도 왕자리를 넘보지 않고 신의를 지킨 분낙 가문과 왕실의 의리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왕자에 대한 교육은 충실히 계속되었고, 분낙은 왕자의 견문을 넓혀 주기 위해 자와, 인도 등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출라롱컨 왕자는 20세가 되던 해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 때부터 출라롱컨은 태국개혁을 시작했습니다.
태국역사를 보면 태국 왕조에는 타이족,크메르족, 그리고 분낙가문이라 불리우는 중동 페르시아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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