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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야(Pattaya)이해

태초클럽 2017. 10. 2. 13:03







파타야(Pattaya)이해







파타야 위치


파타야는 태국해변휴양지 도시이다.태국 걸프만(Thailand Gulf)만에 위치한 도시로 방콕에서 동남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파타야는 과거 촌부리주의 속하는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으나 베트남전쟁 이후 규모가 커진 경제,몰려드는 인구로 촌부리주에 속한 지역이 아닌 자치도시(Mueang Phatthaya)로 승격이 되었고, 주변의 탐본(Tambon-한국의 郡또는 區정도에 해당)인 농푸( Nong Prue) 나끄아( Na Klua)  훼이야이( Huai Yai)의 일부분, 농파아이( Nong Pla Lai)의 일부분까지 포함하는 거대도시로 발전했다. 여행객들은 파타야를 단지 북부의 나끄아비치,파타야비치, 남부의 좀티엔비치 그리고 두번째도로(싸이썽),세번째도로(싸이쌈)을 포함해서 수쿰빗대로변까지 아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은 훨씬 더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


파타야는 이들 지역외에 파타야에서 방콕쪽 방향의 산업단지와 무역항지역인 시랏차,램차방,촌부리지역까지 영향을 미치고있어 파타야의 확장세는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하기 힘들다. 베트남전쟁지역이전에는 촌부리의 자그마한 항구에 불과했던 파타야가 이제는 촌부리지역 대부분을 영향권에 두고, 촌부리 이름마저  없애고 파타야로 갈아치울 기세다. 파타야 인구는 2010년기준 10만 7천명에 불과하나 이는 전적으로 파타야에 주소를 둔 태국인을 기초로 한 것이므로, 파타야 지역에 실제적인 인구를 추산한다면 두배이상으로 보는 것이 맞다. 2017년 현재 파타야 인구통계가 나오지 않았으나 파타야 중심부는 대략 30~40만, 파타야 외곽까지 포함한다면 100~13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2- 파타야는 위 지도에서 옅은 노란색지역에 해당한다.





파타야 역사


파타야(Pattaya)라는 지역명은 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중 하나인 탁신대왕의 이름과 관계가 있다. Phraya Tak(나중에 탁신대왕으로 변경)의 행군에서 비롯되었다. Phraya Tak은 1767년 버바군대가 아유타야 왕국을 완전히 파괴하기전  아유타야에서 찬타부리까지의 군대를 이끌고 행군을 했는데, 파타야 지역은 이들 행군지역중 하나였다. 프라야탁( Phraya Tak)은 현재의 파타야 지역에서 파타야지역의 맹주(盟主)를 자처하는 지역토후인 Nai Klom를 우연히 만나 얼굴을 맞대고 협상을 벌였다. Nai Klom 은 프라야탁(Phraya Tak)의 위엄있는 모습, 그의 군대의 용맹함에 놀라 싸움없이 파타야 지역을 양도했고, 그는 프라야탁 군대의 일원이 되었다. 프라야탁(Phraya Tak)과 나이콤( Nai Klom )의 군대가 만난지역은 나중에 "Thap Phraya"라 불리워졌는데 이 것은 "프라야군대(army of the Phraya)"라는 의미이다."Thap Phraya"라는 이름은 나중에 파타야(Pattaya)로 변했다. 파타야 지명중에는 ."Thap Phraya"에서 유래된 곳이 몇 곳 있는데 그중 하나가 데파싯야시장(Thep Prasit Night Market)이다.


파타야는 1960년대까지는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베트남 전쟁당시 미국정부는 태국에 원조및 기타 차관등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타야남부 사타힙 인근 우타파오와 주변지역을 미군물자 공급처및 기지로 사용했다. 이들 기지의 미군들은 미군기지를 벗어서 파타야 어촌을 방문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다.항간의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코랏(이산지방의 중심)미군기지 근무중인 500명의 미군들이 1959년 6월29일 1주일간 휴가를 맞아 차를 몰아 파타야까지 여행을 갔었다, 당시 미군들은 파타야비치 남쪽끝에 위치한 태국인 대지주인 Sunthorn의 집 몇채를 빌려 휴가를 즐겼는데,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가져, 미군기지로 돌아가 날마다 파타야 1주일 여행을 떠들었다고 한다. 이들의 파타야 추억은 태국내 미국인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미군들의 귀까지 들어갔다. 결국 파타야는 코랏지역의 미군기지, 파타야 남쪽 우타파오 미군기지들이 즐겨찾는 장소가되었고, 이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는 미군들이 사랑하는 휴양지가 되었다. 이후 파타야는 태국정부의 묵인(사실상 박정희정권의 미군기지촌 지원과 비슷한 환경)내지 방조하에 빠르게 발전했다. 미군들이 뿌리는 달러로 방콕거주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가난에서 탈출하고자하는 이산지방주민들, 그리고 이산지방에서 암암리에 성행하는 인신매매등등으로 파타야는 향락도시로 변했다.   





파타야 산업


파타야 지역은 주요산업이 관광산업이다. 2015년 현재 파타야에는 약 2000개의 호텔,136,000개의 객실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등록하지 않은 미인가 호텔,게스트하우스, 숙박업형태의 콘도임대등등을 고려하면 훨씬 더 많은 호텔과 객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파타야 지역이 오늘의 해변휴양지로 발달하게된 배경은 전적으로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잇점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미군들의 휴식처로 제공되었다. 미군들의 저급문화에 맞는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이들 기지촌의 수많은 유흥종사자들은 파타야와 가까운 이산지방에서 공급되었다.  


파타야는 베트남전쟁의 죽음을 넘나드는 미군들의 휴식처 수요로 만들어진 해변휴양지이자, 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이산지방 사람들의 가난에서 탈출하고자 모여든 지역이라는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전쟁과 가난의 고통이 잉태한 해변휴양지이므로 태생자체가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다. 따라서 파타야는 오늘날까지 태국에서 가장 저급한 문화가 지배하는 휴양지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파타야 유흥가는 이산지방출신의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파타야는 태국경제규모가 커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다시한번 각광을 받고 있다. 태국부의 90%이상을 갖고 있는 방콕이 인구포화상태가 되고, 주거환경이 날이갈수록 악화되자 방콕거주 부유층들은 세컨하우스 개념으로 파타야와 후아힌을 주목하고 있다. 최근 파타야에는 파타야북부,남부를 중심으로 수많은 고층콘도가 들어서고 있으며,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수십억대의 고급빌라들도 들어서고 있다. 이들 해변가의 고층콘도들은 아름다운 해안선을 망친다해서 파타야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럼에도 파타야 개발은 멈출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터미널21 쇼핑몰을 비롯 수많은 쇼핑몰, 위락시설들이 계획되어 있고, 몇개는 오픈을 서두르고 있다. 파타야 비치 지역은 더이상 개발할 곳이 없으므로 남쪽의 좀티엔비치를 중심으로 고급리조트들이 계속들어서고 있다.북부 나끌루아비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개발 움직임은 카오키여우 오픈주와 호랑이공원이 위치한 시랏차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오늘의 파타야를 만든 주역들




파타야가 태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휴양지로 인식되는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문화 자체가 유럽대비 저급문화인데, 미국인중 가장 낮은 수준의 미군들이 파타야를 자그마한 어촌에서 세계적인 해변휴양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파타야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파타야에 프랑스파리의 카페문화,아이리쉬 펍문화, 독일의 비어바 문화가 아닌 미군들의 '벗고 춤추는' 아고고바(A-GO-GO Bar)문화가 들어왔고, 이어서 미군들의 성욕구를 흡수하기위한 미군기지촌 성격이었기 때문에 파타야는 오랫동안 태국저급문화를 대변해왔다. 그결과 파타야는 태국사람들도 꺼리는 해변휴양지로 전락했다. 그 결과, 해외여행자들도 "어디갑니까?" 할 때 ' 파타야 갑니다'라고 말하기 쉽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뒤늦게 태국정부는 파타야의 이미지를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오랫동안 파타야 이미지가 '성해방구'라는 성격이 있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파타야에 로열클리프, 두싯파타야에 이어 2000년대 인터컨티넨탈 파타야, 힐튼 파타야, 홀리데이인 파타야, 아마리 오션 파타야, 센타라그랜드 미라지등등이 오픈하면서 파타야의 낡고 어둠컴컴한 이미지를 벗기는데 일조하고 있다.


파타야의 향락이미지를 주도한 미국 다음 찾아온 주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석유,가스등 에너지자원,철광석등의 천연자원으로 국가의 부가 상승하자 국민들에게 해외여행자유화를 전격 단행했고, 러시아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태국 파타야까지 몰려왔다. 러시아자본,러시아 마피아들은 파타야 지역을 눈여겨보면서 파타야 지역의 콘도,호텔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워킹스트릿 몇몇 업소를 사들여 러시아 여성들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워킹스트릿에는 러시아무희들과 성매매를 하는 러시아 여성들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파타야는 러시아인들이 늘어나자 러시아 상테스부르크와 자매결연을 맺기도 하고 다른 지역들과 자매결연을 서두르고 있다. 한 때 파타야는 러시아로 넘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파타야에는 러시아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현재는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러시아인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휴양지이다. 워킹스트릿을 비롯 해변도로바,레스토랑에서 러시아어 간판을 보기는 어렵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인들은 파타야 주요고객중 하나이다.


러시아가 석유가 하락,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미국,유럽의 경제제재조치로 루불화 폭락을 겪자 러시아인들이 서서히 사라져 파타야는 한동안 근심이었으나 얼마안가 러시아인들이 떠난 자리를 중국인이 차지했다. 중국인들이 파타야 지역으로 몰려들자 중국 칭다오,무한,장계지등은 파타야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기도 했다. 파타야 주요호텔들, 특히 패키지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형 호텔들은 중국인들이 조식당의 반이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의 행렬은 파타야비치, 알카자쇼장, 산호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파타야비치 제트스키,패러세일링등 해양스포츠샵에는 중국인을 나타내는 깃발부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파타야비치가 도로변은 중국패키지여행객들이 타고 대형버스로 늘 북적인다. 어느 덧, 파타야는 중국인들의 천지가 되었다. 현재 파타야 주역은 중국이다. 파타야가 미국인-러시아인- 중국인순으로 메인시장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중국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파타야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결코 유쾌하지 않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베트남 전쟁의 후방기지 그리고 미군들의 성해방구로 파타야를 선택함으로서 파타야는 조그마한 어촌에서 세계적인 성향락지로 변했다. 가난한 태국은 미군들이 뿌린 달러를 모으기위해 파타야를 미군들의 기지촌으로 사용하는데 허용했고, 이산지방의 가난한 여성들은 미군들의 달러를 벌기위해 파타야 향락산업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이들 기지촌에서 나온 미국달러는 태국경제를 일으키는 자금으로 사용되었으나 상당수는 방콕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극히 적은양의 미군달러가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사용되었음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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